갓난이를 죽여라, 왜? 어떤 아기이기에…

기사등록 2010/12/25 09:41:00 최종수정 2017/01/11 13:02:26
【서울=뉴시스】양태자의 유럽야화<28>

 유럽 중세의 영아살해는 어떠했을까? 어쩌다 부주의로 일어나는 영아 사고야 어쩔 수 없었지만 의도적인 영아 살해는 그때도 지금처럼 엄한 벌을 받았다. 영아 살해 기록에 의하면 남부 독일에서는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는 방법이 많았던 반면, 북부 독일서에는 말뚝에 묶어 산채로 매장(Lebendigbegraben)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한다.  

 프랑크푸르트(1562~1696)에서는 영아 살해 때문에 여자 43명이 고발당했는데 그 중 26명은 시에서 쫓겨나고, 18명은 처벌을 받았다. 아우구스부르크(1620~1786)에서는 여자 15명이, 뉘른베르크(1503~1743)에선 67명, 단직히(1558-1731)에서는 170년의 시간 차를 두고 62명이 각각 사형에 처해졌다고 두엘멘 교수가 밝혔다. 두엘멘 교수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사료 2개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먼저 ‘수산나’라는 22세 여자다. 그녀는 고아로서 숙박업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다. 1770년에 손님으로 온 네덜란드 상인과 잠시 사랑에 빠졌고, 임신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녀가 너무나 철저하게 임신 사실을 감췄기에 의사까지도 임신으로 비대해진 그녀의 몸을 과로로 부었다고 진단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철저히 숨기고 부은 몸인 척 일했지만 그녀는 결국 해고당한다. 혼자서 아기를 낳은 수산나는 아기를 즉시 살해해 버렸다. 그렇지만 아기는 이내 사람들에 의해 발견됐다. 그녀는 영아 살해죄로 고발을 당하고, 1772년 1월14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많은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또 다른 예는 ‘아그네스’라는 여자로 기혼 군인과 관계를 맺어 임신했다. 이 사실을 안 군인의 아내와 아내의 여동생이 합심해 낙태시킬 방법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결국 그녀는 아기를 낳아 즉시 살해했고, 군인의 아내와 아내의 여동생이 시신을 묻었다. 1646년에 그 일이 들통이 나면서 그녀는 법정에 서게 됐고 프랑크푸르트의 마시장에서 목이 떨어졌다. 군인과 그 아내도 프랑크푸르트에서 영원히 추방됐다.  

 물론, 당시에도 처녀가 아기를 낳으면 수치심을 느꼈고, 사회에서 매장된다는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이런 일로 사형까지 당할 정도로 심각한 일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혼외에서 태어난 애기의 엄마는 대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출신이 아니면 중동이나 아프리카 출신으로 귀족들의 집에 살던 여종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비윤리적인 혼외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들(Bastard)은 평생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 상황은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평생 그들의 그늘에서 기 죽고 살았던 우리의 조선시대와 많은 유사점이 있어 보인다.  

 비 서민들은 이렇게 혼외의 임신 때문에 사회의 벌이 무서워 벌벌 떨다가 목 베이는 죽임을 당한 반면, 귀족들에겐 혼외 자녀를 갖는 것이 오히려 정상으로 여겨졌다. 만약 정상적으로 결혼한 부인에게 애가 없을 땐 더 더욱 관용을 베풀었다 한다. 참 공평하지 못한 사회라는 것이 느껴진다.  

 중세유럽의 낮은 계층에 속하는 집안의 자녀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1300년경 사료에 의하면 가난한 부모들은기근이 들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에 허덕일 때 자녀들을 귀족의 집에 종으로 팔거나 줘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7~8살된 자녀들을 부잣집에 급사, 궁녀, 종으로 보내거나 수도원의 평수도사로, 장사하는 집 아니면 배타는 어린이 선원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런 문헌을 들여다 보면 옛날에 우리가 먹고 살기 어려웠을 때와 유사한 점이 참 많다. 바로 1960~1970년대에 가난한 집 여아가 부잣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할 때 ‘식모’ 라는 칭호로 통용됐던 것처럼 말이다.  

 당시 좀 나은 경우도 있었는데 다름 아닌 그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일을 배우며(Lehrverhältnisse) 살아가는 어린이들이다. 일을 배우고 있으니 일단 장래의 희망 같은 것을 꿈 꿀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시 속을 들여다 보면 노동 착취와 심한 학대가 따랐고, 이를 견디지 못한 어린이들이 뛰쳐나가 거리의 거지가 되곤 했다고 한다.  

 로마 시대 때부터 시작해 중세시대까지 거리로 나선 상당수 어린이들은 어른들에 의해 팔과 다리를 잘렸을 뿐만 아니라 눈까지 찔려 장님이 됐다. 발이 기형된 어린이들도 있었다. 이유는 이런 어린이들을 거리에 내몰아 사람의 동정을 많이 받아 동냥을 넘치게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참 처참하고, 믿기 어려운 이런 얘기들이 전해져 내려 오는데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렇지만 오늘날까지도 이런 문제가 다 근절되지 않는 듯하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국가에서 아직도 어린이들이 거리로 내몰려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소식을 매스컴을 통해 끊임없이 전해들을 수 있지 않는가?  

 전해 내려오는 얘기로는 옛 게르만 민족은 집에 자녀가 태어나면 집에서 키울 것인지, 아니면 갖다 버릴 것인지 가장이 결정권을 가졌다. 또 버리지 않고 키운다고 해도 생활이 빈곤해졌을 때 아들들은 종으로, 딸들은 창부로 보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대개 교회나 수도원 앞에 어린이들이 잘 버려졌다. 그래서 당시 수도원 앞에는 버려질 어린이들을 놓아두고 갈 공간까지 마련됐을 정도라는 기록도 있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가난과 버림은 한 쌍의 짝’이란 말이 위의 사실들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다.  

 이렇게 버려진 어린이들이 거리로 무더기로 나돌아 다니자 이런 아이들을 절멸시키기 위해 당시 뮌헨 지방에서는 마녀로 몰아세운 적도 있었다. 특히, 불구자(Wechselbälger)나 기형아(Kielkröpfe)는 ‘마녀의 아이’나 ‘악마의 아이’로 더욱 배척당했다.  

 또, 당시에는 쌍둥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수치로 여기고, 밖에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한 동안 이상한 설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쌍둥이는 어머니가 여러 남자와 잠을 잤기 때문에 태어난다고 믿었다. 오늘날 누가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이런 걸 보면 사람들 머리에 잘 입력된 시대적 사고가 생활 전반을 규정지었다는 것을 앞의 쌍둥이 이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오늘날 독일의 고아원은 더 이상 부모가 없어서 오는 곳이 아니다. 대개는 결손 가정 자녀들이다. 필자가 어느 날 독일의 한 고아원에서 한 독일 어린이를 붙잡고 “왜 여기 오게 됐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어린이는 “우리 아빠는 여자친구 찾아 갔고, 우리 엄마는 남자 친구 찾아 가게 됐기 때문에 자기는 여기서 살 수 밖에 없다”고 어린이답지 않게야무지고 당찬(?) 대답을 했다.

 비교종교학 박사 ytzm@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