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3m 초대형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국보됐다

기사등록 2021/06/23 10:13:14

[서울=뉴시스] 국보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1.06.23.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국보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1.06.23.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한 삼신불 조각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불삼신불좌상(求禮 華嚴寺 木造毘盧遮那三身佛坐像)'이 국보가 됐다. 

문화재청은 보물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불삼신불좌상'을 국보로 지정하고, '울진 불영사 불연(蔚珍 佛影寺 佛輦)'을 비롯해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完州 松廣寺 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 및 塑造十六羅漢像 一括)', '송시열 초상(宋時烈 肖像)' 3건을 보물로 지정했다고 23일 밝혔다. 

국보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교조각 중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로 이뤄진 ‘삼신불로 구성된 유일한 작품으로 조선 시대 불교사상과 미술사 연구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아 왔다.

삼신불은 화엄사상에 근원을 둔 도상으로서, 변상도나 사경에는 종종 보이지만, 조각품으로는 화엄사 사례가 유일하다.

화엄사 대웅전에 봉안된 3구의 좌상은 1635년 당대 유명한 조각승인 청헌과 응원, 인균(印均)을 비롯해 이들의 제자들이 만든 17세기의 대표 불교조각이다. 모두 3m 넘는 초대형 불상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앞도감을 준다.

특히, 최근 발견된 삼신불 복장유물 등 관련 기록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화엄사를 재건하면서(1630∼1636), 대웅전에 봉안하려고 삼신불을 제작한 시기(1634∼1635년)와 과정, 후원자, 참여자들 실체가 더 명확하게 밝혀졌다.

발원문에 의하면 전국 승려집단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팔도도총섭을 역임한 벽암 각성(1575∼1660)의 주관 아래, 선조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 이광(1589∼1645) 부부와 선조의 사위 동양위 신익성(1588∼1644) 부부 등 다수 왕실 인물과 승려 580여명을 포함한 총 1320명이 시주자로 참여했다.

삼신불좌상은 화려한 연꽃을 갖춘 대좌(부처의 앉는 자리)와 팔각형 목조대좌에 다리를 서로 꼰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다. 거대한 규모와 단순하면서도 선이 굵게 처리된 조각솜씨로 중후한 느낌을 더한다.

이 삼신불상은 당시 가장 유명했던 조각승 집단인 청헌파와 응원·인균파가 참여한 만큼 표현에서도 각 유파의 조각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근엄한 표정의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상은 청헌파가 제작한 것으로 판단되며 부드러운 얼굴에 작은 눈과 두툼한 눈두덩이가 표현된 노사나불상은 응원과 인균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17세기 대표 조각승 청헌, 응원, 인균과 제자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  완성한 기념비적인 대작으로 불사를 주관한 벽암 각성, 의창군 이광 등 왕실의 후원이 합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제작된 목조불상 중 가장 크고, 조각으로 유일하게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여래불로 표현된 삼신불 도상이라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고 중요할 뿐 아니라 예술·조형적 수준도 조선 후기 불상 중에 국보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임을 인정받았다.
[서울=뉴시스] 보물 '울진 불영사 불연' 옆면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1.06.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보물 '울진 불영사 불연' 옆면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1.06.22. [email protected]

보물로 지정된 '울진 불영사 불연'은 1670년 화원으로 추정되는 광현, 성열, 덕진 등이 참여해 조성한 2기의 불교의례용 가마다.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 후기 불연 약 20기 중 형태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다.

불교목공예의 일종인 불연이 보물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불연은 불가의 불보살상, 사리, 경전, 불패(보살의 존호나 발원내용을 적은 나무패), 영가(불가에서 망자를 뜻하는 말) 등 예배 대상을 가마에 싣고 의식이 거행되는 장소로 모셔오는 시련의식에서 쓰이는 중요한 의식법구다.

지금까지 알려진 불연은 모두 17세기 이후 제작됐고 그 중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반면 '울진 불영사 불연'은 2기 모두 분명한 연대와 승려 학종이 좋은 장인을 만나 불연을 제작하게 된 배경, 제작에 동참한 시주자, 불연 제작자로 추정되는 스님 등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불교목공예 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서울=뉴시스] 보물 '울진 불영사 불연' 세부 모습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1.06.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보물 '울진 불영사 불연' 세부 모습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1.06.22. [email protected]

전체적으로 단아한 균형미를 갖췄고 나무로 얽어 만든 둥근 궁륭형(활이나 무지개처럼 둥글게 굽은 형상) 지붕과 네 귀퉁이의 봉황조각, 난간의 용머리 장식, 가마 몸체 전면에 표현된 연꽃, 국화, 화초 장식에서 보이는 조형미와 조각솜씨가 뛰어나다.

특히, 불연의 몸체 주렴(구슬을 꿰어 만든 발)에 동경(청동거울)을 매단 최초 사례로,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되는 동경이나 불화의 복장낭 앞에 매단 동경처럼 어둠을 밝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상징으로 추정된다.
[서울=뉴시스] 보물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1.06.23.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보물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1.06.23. [email protected]
'울진 불영사 불연'은 조선 후기 불연 중 제작 당시 온전한 형태를 간직하고 제작배경을 상세히 담은 명문이 남아 있는 점, 공예기술 면에서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갖춰 보물로 지정해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보물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은 1656년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당시 제작된 나한상 중 수량과 규모면에서 가장 크다.

이 일군의 불상은 제작 당시 수조각승 무염의 통솔 아래 조각승들이 1∼4명씩 분담해 제작했다. 참여 조각승은 무염·승일파, 현진·청헌파, 수연파 등 역량이 뛰어났던 17세기 조각장들을 계승한 인물이자 당시 불교계를 대표한 승려 벽암 각성(1575∼1660)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그 만큼 완주 송광사 나한전 불사의 중요성을 가늠케 한다.
 
완주 송광사 불상은 조각과 더불어 개금·개채 작업 등 조각승과 불화승간의 협업 체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역이 다른 화원들이 어떻게 협업관계를 구축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유행한 목조와 소조, 채색 기법을 활용해 화려하며, 나한상 표정과 몸동작에서 작가의 재치와 개성을 엿볼 수 있어 작품성도 뛰어나다.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은 송광사를 본산으로 활약했던 조각승들의 활동체계와 제작태도, 경향을 밝힐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서울=뉴시스] 보물 '송시열 초상'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1.06.23.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보물 '송시열 초상'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1.06.23. [email protected]

보물이 된 '송시열 초상'은 조선 중기 정치와 학문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1607~1689)의 모습을 그린 18세기 초상화다. 제천 황강영당에 300년 넘게 봉안되어 그동안의 내력이 분명한 작품이다.

작품 상단에는 '우암 송선생 칠십사세 초상(尤庵宋先生 七十四歲 眞)'이라는 화제가 적혀 있어 송시열의 74세 때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송시열의 초상을 문인화가 김창업이 그렸음을 밝힌 김창협의 화상찬이 적혀 있다. 왼쪽에는 권상하(1641∼1721)가 짓고 권상하의 제자 채지홍(1683∼1741)이 필사한 화상찬이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이 1680년 23세의 김창업이 74세의 송시열을 그린 초본을 참조해 후대에 그려진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 속 송시열은 네모난 회색 사방건을 쓰고 검은색으로 깃과 소맷부리의 가장자리를 두른 회색 심의를 입은 채 두 손을 맞잡아 소매 속에 넣은 반신상으로 묘사됐다.

특히, 주름이 깊게 파인 이마와 눈가, 희끗희끗한 콧수염과 턱수염이 인상적이다. 이는 정치와 학문에서 그의 굴곡진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희고 검은 긴 수염은 세밀하게 표현했지만, 눈썹은 검고 짙게 그렸고, 황갈색으로 주름과 음영을 표현한 얼굴의 상세한 묘사와 달리 의복은 짙은 먹 선 위주로 굵고 간략하게 묘사한 점 등 대비되는 필선을 통해 송시열의 학자적 풍모와 기상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송시열 초상화는 후대에도 추앙이 지속되면서 30여 점이 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진재해(1691∼1769) 등 당대 최고 초상화가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우수한 사례에 속한다.

유려하면서도 단정한 필선, 정교한 채색으로 뛰어난 예술성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송시열 초상'과 견주어도 수준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작품이므로,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button by close ad
button by close ad

이시간 뉴스

많이 본 기사

기사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