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월담] 누가 미당의 이마를 짚을 것인가①

기사등록 2019/10/03 06:00:00

최종수정 2019/10/14 09:55:46

세기말 우울 속에서 만난 미당 서정주와의 비화

친일문학인 논란 속 미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염무웅 국립한국문학관장 제시, 민족주의와 작가주의 조화에 해결점

미당 서정주
미당 서정주
【서울=뉴시스】정철훈 문화부장 = <누가 미당의 이마를 짚을 것인가>

"세월은 아득함의 이름이자 허무의 친구다. 미당을 찾아간 게 벌써 10년 전인 1999년 2월의 일이니 그날은 오늘처럼 태양 아래 아무 새로운 게 없었던 맹물 같은 오후였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 '누가 미당의 이마를 짚을 것인가'라는 제하의 칼럼을 쓴 게 딱 20년 전이다. 그때는 K신문 문학담당기자 시절이었다. 열 일 다 제쳐놓고 불쑥 미당을 찾아간 계기가 따로 있었다. 회상하면 지금도 피식 쓴웃음이 나온다. 아,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신문사에서 내 책상은 벽 한 귀퉁이에 붙어있었다. 편집위원으로 갓 전입한 김훈 선배는 창가 쪽 책상에서 퉁방울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연필을 깎고 있었다.
 PC로 기사를 작성하는 편집국에 살포시 퍼지는 연필 향은 차라리 감미로웠다. 감미로움은 정체모를 향수를 자극했다. 창밖엔 가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구정을 앞둔 시점이었다. 텅 빈 편집국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김훈 선배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창밖의 눈발을 바라보기 위해 창가 쪽으로 다가가다가 보았다. A4종이 위에 연필 부스러기와 심에서 깎여 나온 까만 가루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김훈의 근작 산문집 ‘연필로 쓰기’(2019)에 이런 대목이 있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
그땐 이런 글이 나오기 한참 전이다. 하지만 김훈의 글쓰기에 대한 아날로그적 집념은 한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끔 술좌석에서 들려주던 말이 있었다. 스물두 살 무렵 도서관에서 ‘난중일기’를 읽다가 흉중의 말을 칼로 져며낸 듯한 이순신의 한시 단문들을 보고 매료되었다는 것이다.

'난중일기'를 읽은 후, 학교가 싫어지고 영문학이 싫어져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의 원고를 담당하는 문학기자를 시작으로 몇 군데 신문사를 전전하며 밥벌이의 지겨움을 견디다가 전업작가로 변신한 게 2001년이었다. 그해는 ‘칼의 노래’의 해였고 그의 나이 53세였다. 역산하면 내가 김훈을 만난 건 그보다 2년 전인 1999년이었으니, 그해 2월은 아직 20세기였고 나 역시 창창한 마흔이었다.
그러자니 김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갓 마흔 길목에 그가 깎은 연필 부스러기를 쳐다보던 내 시선에도 잔설은 내렸을 터다.

책상으로 돌아와 잔무처리를 할 때 김훈이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김훈입니다. 설도 가까웠는데 찾아뵙지 못하고 송구합니다. 영광 굴비 한 두름, 보내려고 하는데 주소가 어떻게 되는지요. 네? 서울 관악구 남현동 예술인마을 OOO호라고요." 김훈이 미당에게 굴비를 보낸 이유를 미당의 산문에서 유추할 수 있다.

마당에 나온 미당과 부인 방옥숙 여사
마당에 나온 미당과 부인 방옥숙 여사
"춘추사를 내가 작파하기로 내정하고 있던 겨울의 눈 오는 어느 날 내게는 뜻하지 않은 전화가 걸려왔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걸걸한 목청이 수화기 속에서 껄껄껄 웃곤 자기는 김광주(金光注)라는 사람인데 그 이름을 기억 못 하겠냐는 것이다. 1930년대에 한때 시를 발표하다가 소식이 없어졌던 시인 김광주였다. '왜 기억을 못하겠느냐,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만날 시간이 없건, 있다가 여기로 전화를 걸어주거나, 지금 만날 수 있으면 바로 만나자'는 것이다. '거기가 무얼하는 데냐'고 하니 그건 인제 있다가 만나보면 알 것이고 하고, 그의 집의 소재만을 내가 알 만큼 일러주었다."(<미당 자서전2>, 민음사, 1994)
 
해방 직후 미당이 찾아간 곳은 그 무렵 중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은 김구 선생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였다. 김광주는 미당보다 두어 살 많은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그날 이후 거의 매일 만났고 한국청년회라는 것이 결성되자 김동리 등과 함께 참여했던 처지다. 김광주의 아들이 김훈이었으니, 김훈은 아버지의 친구인 미당에게 명절이면 작은 선물을 보내곤 했던 것이다.
  
그때 직감했다. 예술인마을이라면 미당 서정주가 사는 동네다. 나 역시 대학생 시절, 예술인마을에서 살았는지라 미당이 사는 ‘그 집 앞’을 지나 등교하다가 담장 너머 미당을 몇 차례 넘겨다 본 적이 있었으니, 나는 시쳇말로 무릎을 ‘탁’ 치고 만다. 가자, 미당 댁으로!

창밖의 눈 오는 풍경은 1999년 세기말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모든 것을 빨아들여 유사 빅뱅의 상태에서 다시 무엇인가를 탄생시키듯 하늘의 전언이 천천히 허공에서 떨어지는 눈발이었다. 연필과 눈발.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 같은 단순한 사물과 풍경은 아직 누구도 가보지 못했지만 결국 모든 사람들이 가게 될 21세기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래, 무작정 가보자." 내심의 혼잣말이었지만 그건 다가올 21세기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김훈의 통화를 엿들은 순간부터 귓전에 맴돌던 미당에 대한 말일 수도 있다.

무의식적으로 편집국에서 나왔다고나할까. 발걸음은 사당동으로 가는 지하철역으로 움직였다. 사당역에서 내려 남현동 예술인마을로 향할 때 희미한 현기증이 일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미당에게 가는 것일까. 만약 미당이 집에 없으면 낭패가 아닌가. 아니, 미당은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과연 문을 열어줄 것인가. 많은 질문들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몸을 이끌고 발은 터벅터벅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무엇인가에 홀렸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 테고 그건 확실히 세기말의 감성(感性) 여행쯤으로 이름붙일 일이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 2019년 가을, 느닷없이 미당을 호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7월 24일 열린 간담회에서 염무웅 국립한국문학관 초대관장이 언급한 친일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그 단초였다. 한국문학관 운영 방향에 대해 설명회 형식의 자리에서 염 관장은 "친일 작가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논란거리"라며 "친일에 대한 내용을 알고, 반민족적인 행태가 나타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친일작품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말을 미당과 관련해 해석하면 친일작가인 미당과 그의 작품도 한국문학관에 수집, 전시하고 연구해야한다는 함의가 읽혀진다. 염 관장은 이어 "중국의 베이징 현대문학관의 경우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과도하게 반영돼 과도한 측면이 있고, 문인들이 스스로 만든 문학관의 경우 작가주의의 성격이 짙어 취미활동의 연장선과 같은 느낌도 들었다"며 "한국문학관은 적절한 조화의 선을 찾으면서 운영해나가려 한다"고 설명했다.
 
그 적절선이 민족주의와 작가주의의 조화에 있을진대 미당에게 민족주의적 요소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부족언어의 마술사'라는 평가답게 미당에게 작가주의적 요소를 부여함은 마땅한 일일 것이다. 친일시비에서 자유로울수는 없지만 미당을 한국의 문학유산에서 제외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다시 20년 전. 나는 미당 자택의 대문에 달린 초인종을 눌렀다. 이내 인터폰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뉘시우?" 부인 방옥숙 여사의 목소리였다. 초인종은 눌렀으되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저, 김~훈입니다.” 엉겁결이라지만 나는 대체 누구의 이름을 대고 있는 것인가. 왜 나는 여기 왔던가. 차라리 월담을 하고 말일이지. 나는 왜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걸까. 차라리 내가 영광굴비가 되어 배달되었다면, 하는 당혹감과 후회가 몰려왔다.
서울 남현동 미당 서정주의 집(봉산산방)
서울 남현동 미당 서정주의 집(봉산산방)
안에서 대문을 여는 스위치를 눌렀는지, 맥없이 대문은 빼꼼하게 열리고 나는 빼꼼한 대문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키큰 소나무가 마당에 서있었고 잔디도 드문드문 벗겨진 정원은 대여섯 평이나 될까. 그때 서너개 계단 위에 위치한 현관문이 열렸다. 미당이 한복 바지춤을 붙잡고 햇살을 받아 찡그린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누구요? 보아하니 김훈은 아닌데 웬 낮도깨비인고?"
 
 머리카락이 삐쭉 솟는 것 같았다. 이만저만해서 찾아왔노라고 변명 비슷한 말을 급조해야 했으나 급조되기 전에 미당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먼저 귓전으로 날아왔다. "무슨 특무대처럼 불쑥 나타났구먼."

이 한 마디에 미당의 멘탈리티가 묻어있었다. '특무대' 운운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냐는 의미와 상통한다면 미당이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순간의 멘탈이란 어떤 피해의식과 맞물려 있음을 반증한다. 미당의 피해의식, 그 발로는 친일 시비와 전두환 찬양으로 인해 매도당한 자존감의 상처일 터. 요즘 유행어로 '미당의 적(敵)은 미당'이었다.

 통성명을 하고 명함 따위를 내민 뒤에야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안방에 들어가 아랫목쪽에 자리를 잡은 미당에게 우선 큰 절을 했다. 손사래를 치며 절을 받는 둥 마는 둥, 미당은 마뜩치 않은 표정이었다. "안 좋은 때 왔어. 내가 병석에 누워 있는 줄은 알고 왔겠지. 내가 긴 말은 못하겠네." 굳었던 낯빛이 다소 풀어지는가 싶더니 곁에 서 있던 부인에게 말했다. "맥주 좀 내오시오. 지난번에 궤짝으로 들여놓은 거 있지요."

미당이 연거푸 따라주는 맥주 서너 잔을 마신 후 정신이 차려졌을 때 전북 고창에서 추진중인 미당문학관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았지만 "다음에는 예법을 갖춰 찾아오게나"라는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술인마을 언덕길을 타박타박 걸어내리면서도 마음은 무거웠다. 심중의 질문은 따로 있었다. 그럼에도 노부부만 기거하는, 조도 낮은 안방에서 상대방을 꿰뚫어볼 듯한 안광을 번뜩이는 미당의 어떤 자장권 앞에서 말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질문이 지금도 맴돈다. "선생님은 1990년 구공산권 국가를 여행하면서 모스크바에 들렀을 때 옛 문학적 동지였던 시인 오장환의 행적이 궁금하지 않았나요. 오장환이 1948년 신병 치료차 모스크바에 갔었다는 사실을 훤히 꿰고 있는 선생님의 오장환에 대한 소회가 궁금합니다."

말은 입속에서 검은 물질이 되어 질겅거릴 뿐, 안방 보료에 누워 노곤함을 달래고 있을 미당은 이미 너무 멀리 있었다. 미당은 해방 전인 1936년을 전후해 오장환과 형제처럼 어울렸다. '미당 자서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시인 오장환이라면 나와는 1936년에 낸 시동인지 '시인부락' 때부터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한동안은 두 쌍동이 아이처럼 늘 맞붙어 다니며 지내던 사인데, 해방 바로 뒤 한동안은 나를 따라 미사네 술집에도 드나들고 하더니, 오래잖아 내게는 등을 돌리고 새로 생겨난 좌익의 문학가동맹 쪽으로 끼어들어 버린 뒤로나 길에서 나를 만나도 낯을 딴데로 돌리고 갔지만, 나는 그걸 멍하니 보고만 있는 밖에 어쩌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나는 이 오장환이만은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나는 그를 타일러 좌익으로 넘어가는 걸 막아보려고 작정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우연히 천도교 본부 마당에서 몇몇 젊은 패들과 함께 나를 만났을 때, 그의 패들 가운데 누가 나보고 들으라고 '친일파' 어쩌고 하며 깔깔거리고 웃으니 맞장단쳐 소리내 웃으며 나를 힐끗 돌아다보더니, 그 뒤로 오래잖아 그의 외면이라는 것이 시작되었고 또 친일파 처단을 제일 큰 구호로 내걸던 문학가동맹에 들어가 버리고 말아서, 내가 뭐라해야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아 작파하고 말았다. 아니, 이건 어쩌면 내 자격지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위와 같음)

미당은 해방 직후 좌익계 문인들이 결성한 문학가동맹에서 친일파로 낙인찍혀 친구인 오장환과도 멀어지게 된다. 그러니 미당의 친일 시비는 해방 직후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뿌리깊은 트라우마로 미당의 멘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갈림, 어긋남, 외면 등의 단어가 미당의 머리 속에서 번갯불처럼 스쳐간 후 미당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침잠뿐이었을 것이다. 자기 안으로의 침잠 말이다.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것이었다. "선생님의 침잠 속에 오장환은 어떻게 가라앉아 있었나요?" 미당은 살아생전에 친일 문제를 청산하지 못했다. 아니, 더 곡진하게 말하면 친일은 청산의 대상이 아니다. 그게 문제다. 청산되지 않고는 역사는 한 걸음도 앞으로 전진할 수 없다. 그렇다면 청산인가, 봉합인가, 절충인가. <다음편에 계속>
미당의 유품인 여권, 돋보기, 파이프,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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